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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썅 다반사

군대, 그 짧은 26개월의 더 짧은 리뷰 - 1.


징병검사 - 경남지방 병무청에서 받다. 아마 본적 경남 산청이기 때문이리라. 사는 곳은 부산인데도 불구하고 여
비까지 챙겨줘가며 창원의 경남지방 병무청으로 오라더라. 길도 모르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시, 계획 도시라 그런지 길 하나는 진짜 쭉쭉 잘 뻗어 있었다. 물어 물어 찾아간 창원의 경남지방 병무청, 평범하게 신체검사를 받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아직 치기어린 열아홉의 청년들은 오지게도 말썽을 부렸다. 말 안듣는 몇몇은 뒤로 돌아서 바지 내리고 엉덩이를 벌리는 참혹한 벌을 받기도 했었다. 시키는 대로 안하면 재검이라는데 당해 낼 용자 따윈 판타지에서나 나오는 거다. 그 와중에 그래도 '현역 1급'을 판정 받았다. 당시 몸무게 97kg.





입대 - 전문대에 입학하였으나 인문계 고등학교 문과를 졸업한 덕분에 '공대', 그리고 '수학'에 적응 실패하여 한 학
기를 고스란히 날린 후 All F 학점을 받는다. 방황하던 나 대신 아버지와 친구가 휴학원을 제출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날아온 입영 통지서, 1994년 12월 27일. 크리스마스는 지내고 들어 갈 수 있어서 행운이다 따위의 감상적인 생각은 금물, 24일 심야 프로로 잼캐리 주연의 '덤 앤 덤머'를 남자'친구'와 감상하다. 다음날 부모님께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정도의 가벼운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 부산에서 친구들과 한잔하고 일박. 다음날 서울로 향했다. 따라나선 친구가 무려 네 명, 친구들 사이에서는 가장 먼저 입대하는 터라 반 백수 였던 놈들이 모조리 따라나섬. 영등포 근교에서 아는 형을 만나 소주 20여병과 체리소주 등의 칵테일주 20 주전자를 마신 후 입대 당일 오전 10시 경 이름 모를 여관에서 깨어남. 화장실 변기가 깨져있고 여기저기 토사물의 흔적, 한 놈이 신발에서까지 발견되어 경악, 부랴부랴 정신을 챙기고 도망치듯 그곳을 나와 청량리 역으로 출발, 도착하였으나 기차표가 없다는 사실에 망연자실, 대기하던 택시기사가 미터켜고 1.5배의 운임을 부름. 총 다섯명이 택시를 타고 춘천 102보로 출발. 정상적인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중간에 오바이트 한다고 몇 번이나 택시를 세운 끝에 힘겹게 춘천에 도착, 택시비로 6만원 정도를 냈던 걸로 기억한다. 아뿔싸, 밥먹을 돈도 없다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택시비를 좀 깎을 걸 하는 후회, 결국 KFC 녀석 - 닮았다. 그 할배 -이 '내 이럴 줄 알았지'라며 양말에서 비상금을 꺼내듬. 그 돈으로 머리깎고 - 바리캉을 앞머리 부터 대더라...- 춘천 막국수를 한그릇 먹은 후 102보로 입소. 입소시 소지금은 5천원, 고맙다 친구들. 이거라도 남겨줘서...

102보 - 입소하여 각 사단들을 소개 해 놓은 전시관을 지나며 수근수근 대는데 '인제, 양구, 원통'과 '이기자'만 안가면 된다는 말이 귀를 어지럼힘. 전투복과 장구류를 지급받고 사복을 곱게 개어 집으로 부치고 3박 4일의 대기기
간을 보냄. 그 과정에 열 댓명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열외를 받았으니 결국 세명을 제외하곤 전부 자대 배치를 받음. 주택복권-당시에는 최고의 상금- 뽑는 느낌이 들던 '뺑뺑이'를 거쳐 배정 받은 사단은 결국 '이기자'. 아! 진짜! 당시 우리를 관리하던 병사들은 죄다 이등병이였는데 꽤나 높은 위치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는 거만함이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신교대
-  웃박달이라는 곳이다. 과거 전두환 시절 삼청교육대였다는 소문도 들리고 나름 흉흉한 전경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10, 11, 12 중대, 세개의 중대가 있었다. 식기 세척장 근처엔 까마귀들이 엄청나게 많았으며 그런 흉흉한 소문들이 진실임을 강변이라도 하는 듯 했다.  그 중 10중대 소속이였고 두 개의 내무실에 200명이 넘는 훈련병들이 생활했다. 패치카가 있는 구형 막사 였으며 일석 점호시 좌에서 우로 번호 한번 하면 105까지 나가는 터라 아흔 아홉, 백, 백 일 - 백 하나가 맞다 - 하면 난리가 났었다. 한바탕 구르고 다시 처음부터 번호 해야 하니까... 세 개의 중대중 10중대는 파라다이스라 불리웠고 12중대는 인간계, 11중대는 지옥이라 불리웠다.  11중대와 12중대는 동일한 건물을 썼으나 구조 같은 것은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 자대 뺑뺑이를 돌리던 날, 강당 같은 곳에 모여 앉아 있는데 뒤에서 누가 부른다. '너, 너, 너 나와. 키 175 이상 뒤로 열외.' 차출이다. 어딘지 이야기도 안하고 한 열로 세운뒤 운동은 뭐했냐, 키는 얼마냐 따위의 질문을 하며 이름을 적는다. 한 녀석은 슬그머니 빠져 다시 자리에 앉는다. 중사였는데 나를 보더니 씨익 하고 웃는다. '넌, 내꺼다.' 하더니 들어가 보란다. 침상배치가 변했다. 같은 자대 가는 애들끼리 모아 놓는 것이다. 아직도 이름이 기억나는 담당 조교의 이름은 '김유신' 병장. '니들 수색대다.' 크헉. 대체 내 군생활은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기자를 피하려 했으나 이기자에 왔고 나름 알보병을 원했는데 수색대란다. 훈려 4주차 즈음해서 신교대의 이사 이야기가 나왔다. 신막사 공사가 끝나 '삼일리'로 이사를 간단다. 덕분에 2일짜리 각개전투도 하루만 빡시게 받았고 사격도 의외로 무던하게 지나갔다. 물론 PRI야 죽어라고 했지만... 단독 군장에 20여 km의 '이사행군'을 하고보니 신막사, 너무 좋다. 샤워도 물 한바가지로 했던 웃박달의 처절함은 이제 추억이 되는 것이다. 새집 증후군이라도 있는 것이였을까? 5주차 말 쯤에 심한 감기에 고열 체온이 42도까지 올라갔다. 밖에서는 약 먹고 뜨끈한 방에서 한잠 푹 자고 나면 나을 것이 사흘을 앓았다. 이때 조교의 특단, 밤 열두시에 끙끙 대는 나를 데리고 화장실로 가더니 다 벗으란다. 다 벗으니 찬물을 튼다. 2월달의 강원도는 춥다. 그 차가운 물을 뿌리면서 100까지 세란다. 이열치열이 아닌 이열치한이다. 새벽에 한번을 더 끌려 나가서 찬물을 맞아야 했지만 덕분에 고열은 사라
졌고 약간의 코맹맹만 남았다. 6주차 마지막 행군, 신교대를 나서 열심히 걷고 있었다. 단독군장에 후줄근한 모양새인 거야 훈련병이니 어쩔 수 없는 것, 수색대 입구를 막 지나고 있었다. 조교 김유신 병장이 여기가 수색대라며 우릴 보고 싱긋 웃는다. 그때 저 앞에서 일개의 '무리'가 악악 대며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말인지도 무슨 군가인지도 모를 엄청난 소리만 우리의 곁을 휙 스치며 지나갔는데 조교 김유신 병장이 또 한마디 한다. '수색대네?' 무슨 아침 구보를 저리 살벌하게 하는가, 전부 반바지에 조끼만 입고 악을 쓰며 달려 가는 모습을 보고 나와 내 동기들은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사히 행군을 마치고 대망의 퇴소. 전전 기수들의 분열을 엉망진창으로 해서 사단장의 명으로 분열이 없어졌다는 반가운 소식. 군생활 끝난 줄 알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간만에 사진첩을 보다 군 시절 사진을 찾아냈다. 강릉 무장공비때 찍은 몇 컷 중 하나. 사진을 다시 디카로 찍은거라 화질이 열악해 얼굴도 안보이지만... 다음에 기회가 되면 스캔을 해 놓아야 겠다. 당시 중대에 배속된 군견병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물론 나도 있다.오른쪽 상단 맨끝이 나다...)